첫 삽도 못뜬 행복주택 ‘산 넘어 산’
지난 5월 20일 국토교통부는 행복주택사업 시범지구로 수도권 7개 지역을 선정 발표했다. 사진은 오류동 시범지구. 김창길 기자 |
2012년 9월 23일 일요일 오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 박근혜 대통령 후보는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집 걱정 없는 세상’ 종합대책을 직접 발표했다. 박 후보는 “렌트푸어(과도한 전월세 자금으로 어렵게 사는 사람들)와 하우스푸어(집을 사기 위해 과도하게 대출했다 빚 갚기 어렵게 된 사람들)를 위한 대책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대선정국에서 대통령 후보가 직접 세부공약을 설명하는 것은 사안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다.
이날 박 후보가 약속한 주요 주택공약은 세 가지였다. 집주인이 자신의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전세자금을 빌리고, 세입자는 은행에 이자를 내는 ‘목돈 안 드는 전세제도’, 은행에 갚지 못한 채무자의 채권을 공공기관이 매입하고 저리의 이자를 내며 자신의 집에 거주할 수 있게 하는 ‘보유지분 매각제도’, 그리고 철도 유휴부지에 임대주택을 짓는 ‘행복주택’이었다. 기존에 없던 정책들이어서 ‘파격적’이었다. 새누리당 고위 관계자는 기자회견 직후 “캠프에서 정말 심혈을 기울여 만든 기발한 정책들”이라며 “박 후보의 서민을 위한 철학이 담겨 있다”고 강조했다.
3.3㎡당 건축비 1700만원으로 추산
그 후 1년이 지났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도 8개월째다. 이 정책들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까. 결과만 보면 초라하다. 목돈 안 드는 전세제도는 9월 말, 보유지분 매각제도는 5월 말부터 시중에 출시됐다. 하지만 이들 상품 판매실적은 아직 ‘0’이다. ‘착한 집주인’이 없어 목돈 안 드는 전세제도는 외면당했고, 부실채권을 강제할 권한이 없어 ‘보유지분 매각제도’는 모퉁이로 밀려났다.
행복주택 상황은 더 나쁘다. 행복주택은 아직 첫 삽을 뜨지 못했다. 주민들 설득작업은 진전이 없고, 공사입찰 공고는 연기됐다. 이런 속도라면 올해 안에 착공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국토부는 최근 행복주택을 담당하는 공공주택기획단을 대폭 보강했다. 1개과를 신설했고, 이명박 정부의 주택정책인 보금자리주택을 담당하던 주택분야 핵심 관료들을 복귀시켰다. 그만큼 상황이 위중하다는 얘기다.
발표는 가장 빨랐다. 5월 20일 국토교통부는 “수도권 7곳에 올해 안에 1만 가구 공급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서울에서는 오류·가좌·공릉·목동·잠실·송파 등 6곳, 경기에서는 안산 고잔 등 한 곳이다. 그러면서 10월 2차 발표에서는 비수도권을 포함한 지구가 포함된다고 말했다.
10월이 됐지만 행복주택 시계추는 5월 20일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오류·가좌를 제외한 5개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계속되면서 시계추는 오히려 뒤로 후퇴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국토부는 당초 올해 안에 오류·가좌 등 2개 지구는 행복주택 착공에 나설 수 있을 것으로 낙관했다. 두 지구에 성공적으로 행복주택이 들어서면 반대하던 다른 지역도 점진적으로 설득이 가능할 것으로 봤다. 4대강 사업을 무리하게 밀어붙인 게 여러 가지 말썽을 일으켰다는 지적이 있었던 만큼 행복주택은 성공사례를 국민들에게 먼저 보여주겠다는 계획이었다. 이런 구상이 어긋난 것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공사)의 기술제안입찰 사전설명 결과 보고였다.
민주당 박수현 의원이 입수한 이 자료를 보면 오류·가좌지구의 행복주택 건축비가 3.3㎡당 1700만원에 달할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민간 아파트의 4배에 이르는 규모다. LH공사는 서울 오류지구에 1500가구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총공사비를 2800억원으로 추산했다. 가구당 건축비로 따지면 1억8670만원이다. 신혼부부형 주택 36㎡를 건설한다고 가정할 경우 3.3㎡당 건축비가 1700만원이 나온다. 가좌지구도 362가구 건설에 총공사비가 660억원, 가구당 평균 1억8200여만원이 들 것으로 추정됐다. 36㎡ 규모의 주택 기준으로 보면 3.3㎡당 1670만원 선인 셈이다. 통상적으로 수도권 민간 아파트 건축비가 토지비를 제외하고 3.3㎡당 400만원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행복주택은 건축비만 민간 아파트의 4배가 넘는다. 철도 인근 유휴부지 땅을 공짜로 얻는다고 하더라도 이런 건축비로는 저가 임대를 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실제 공약 당시 고려했던 땅 포함 총 건설비용은 3.3㎡당 500만원 정도였다.
건축비가 이처럼 많이 나올 것으로 추산된 것은 행복주택의 특수성 때문이다. 철로 위에 인공대지(데크)를 덮은 뒤 소음과 진동이 거의 없는 아파트를 지어야 한다. 특수공법이라 일반 아파트보다는 건축비가 당연히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여기에다 임대주택에 대한 인식 변화를 위해 도서관, 공원, 체육시설, 고령자시설, 보육시설 등을 추가로 지을 방침이어서 전체 건축비는 눈덩이처럼 커졌다.
지난 9월 서울 송파구민회관 앞에서 행복주택 건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이 궐기대회를 열고 있다.연합뉴스 |
35개 건설사 입찰제한도 돌발변수
건설비용을 보고받은 국토부는 깜짝 놀랐다. LH공사는 10월 8일 실시설계 기술제안 입찰공고를 낼 예정이었지만, 국토부는 입찰공고 전날 공고를 보류하고 설계 및 견적 재작성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토부 관계자는 “데크를 설치하고 편의시설을 넣는 과정에서 건축비가 크게 늘어났지만 땅값 부담이 없는 만큼 이를 조금 조정하면 수도권에 건설하는 민간 아파트보다는 싸게 공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국토부의 이런 구상은 사안을 너무 안일하게 보는 것 아니냐는 반론도 나온다. 행복주택 조성지 인근 주민들이 반대하는 이유가 저가의 임대주택이 들어오는 데 대한 거부감인데, 편의시설을 축소시키고 아파트 질을 떨어뜨릴 경우 오류·가좌를 지켜보고 있는 타 지역 주민들을 설득시키기는 더 어려워진다는 얘기다. 국토부의 또 다른 관계자는 “오류·가좌는 시범지구라 잘 지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며 “첫 단추를 잘못 꿰면 사업은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국토부의 또 다른 고민은 추가 지정을 할 만한 땅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박 의원이 입수한 LH 내부자료를 보면 도심 내 국·공유지를 활용해 공급할 수 있는 물량은 3만5000가구로 목표 물량(20만가구)의 18%에 불과하다. 행복주택 입지 가능 부지로 검토 중인 미매각 공공시설 용지를 다 합쳐도 공약에서 제시한 20만가구 건설은 어렵다. 건축비 때문에 선로 위 건축을 피할 경우 사용 가능한 땅은 더 줄어든다. 국토부가 10월로 예정했던 2차 지구 발표를 미루는 것도 이런 고민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돌발변수는 또 있다. 아파트 건설공사에서 담합을 했다며 35개 건설사가 무더기로 관급공사 입찰제한을 당한 것이다. LH공사는 2006∼2008년 성남 판교신도시 등 8개 지구의 아파트 건설공사 입찰에서 담합을 한 것으로 최종 판결난 35개 건설사를 ‘부정당(不正當)업체’로 지정했다. 이렇게 되면 향후 3개월에서 1년간 공공공사 입찰에 들어올 수 없다. 앞서 2011년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들 업체가 담합을 했다며 과징금을 부과했다. 업체들은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9월 대법원은 입찰담합 사실을 확정했다.
문제는 이들의 상당수가 행복주택 건설에 나설 건설사들이라는 점이다. 진흥기업·대보건설·효성·경남기업 등 4개사는 1년 동안, 태영건설·서희건설·한신공영·신동아건설·LIG건설·요진건설산업·서해종합건설 등 31개사는 3개월 동안 공공공사 입찰 참여가 제한된다.
또 조달청도 4대강 담합비리 판정을 받은 현대건설·삼성물산·대우건설 등 15개 건설사에 대해 부정당업자 지정조치를 내렸다. 수자원공사도 한강6공구와 낙동강18공구 등에 참여한 13개 건설사들의 부정당업자 제재 여부를 심의 중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시공능력평가 100위권에 든 상당수 업체가 공공입찰에 참여할 수 없게 된다. 행복주택은 고난이도 공사인데 주요 업체들이 참여할 수 없다면 사업 추진이 어려워진다.
과거에는 부정당업체로 지정되면 해당 업체들이 법원에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내며 시간을 끈 뒤 일정 기간이 지나면 ‘대사면’을 받는 식으로 다시 공공입찰에 참여했다. 하지만 국토부는 이번에는 다르다는 입장이다. 국토부의 한 관계자는 “박근혜 정부 특성상 원칙대로 한다”며 “과거처럼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더라도 실익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병률 기자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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